그리스 산토리니, 전주 한옥마을, 스페인 빌바오를 이미지화한 그림. AI 생성이미지

그리스 산토리니 섬. 흰색 회벽과 파란 지붕으로 통일된 독특한 건축양식이 섬 전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전주 한옥마을. 도심 속 한옥을 지키기 위해 주민들은 불편을 감수했다. 현대적 건축자재 사용 제한, 한옥 유지 비용 부담, 주차 공간 부족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한옥을 보존하고 가꿨다.

스페인 빌바오. 한때 번영했던 조선소와 철강 산업이 몰락하며 도시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1997년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 유치를 계기로 도시는 완전히 달라졌다.

국토교통부가 29일 발표한 제3차 경관정책기본계획(안)은 바로 이러한 성공 사례를 한국 전역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이다. "역사와 미래를 담은 국토·도시·건축 경관"을 비전으로, 경관을 제한하고 관리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는 정책으로의 대전환을 예고했다.

경관, 규제 대상에서 '사회적 자산'으로

제3차 경관정책기본계획 수립의 기본방향. 국토교통부 제공

이번 제3차 계획의 가장 큰 변화는 경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다. 국토부 장우철 건축정책관은 "경관은 단순히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본과 사람을 끌어들이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경관정책은 제도 구축에 집중해왔다. 2013년 경관심의제도가 도입되고, 2015년 제1차 계획으로 경관 가치가 정립됐으며, 2020년 제2차 계획으로 경관관리 체계가 강화됐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주로 '규제와 관리'의 틀 안에서 이뤄졌다.

제3차 계획은 이제 그 틀을 깨고 나온다. "규제·관리 중심의 경관정책에서 협력에 기반한 지원·유도 중심으로 전환"을 명시적으로 천명했다. 경관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경관을 만들고자 하는 지역과 주민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핵심 전략 1: 도시·지역 디자인 혁신사업

이러한 전환의 핵심이 바로 '도시·지역 디자인 혁신사업'이다. 산토리니의 성공 모델을 한국 지방도시에 적용하는 이 사업은, 지역만의 특색 있는 경관을 형성하기 위한 신규 사업이다.

산토리니가 보여준 것은 명확하다. 일관된 독특한 건축양식과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지역 전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얀 집과 파란 지붕, 낮은 건물 높이는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섬의 정체성이자 경쟁력이 됐다. 관광객들은 '산토리니다움'을 경험하기 위해 찾아온다.

국토부는 지역의 건축자산이나 경관자원을 중심으로 일정 구역에 지역 고유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고 적용할 계획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향식 규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역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발굴하고, 그것을 경관으로 구현하고자 할 때 정부가 적극 지원하는 방식이다.

전주 한옥마을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주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한옥을 지키고자 했을 때, 정부와 지자체는 한옥 개보수 비용을 지원하고 주변 인프라를 확충했다. 주민들의 자발적 헌신과 정부의 지원이 결합되어 한옥마을을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로 만들었다. 규제가 아닌 지원이 성공의 열쇠였던 것이다.

핵심 전략 2: 중점경관진흥구역으로의 전환

패러다임 전환은 제도 개선으로도 이어진다. 현행 '중점경관관리구역'이 '중점경관진흥구역'으로 명칭이 바뀐다. 단순한 용어 변경이 아니다. '관리'에서 '진흥'으로의 전환은 경관 정책 철학의 변화를 상징한다.

더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지원책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중점경관진흥구역으로 지정되면 도시·건축 규제 특례가 부여되고, 예산 지원이 이뤄진다. 우수한 경관을 만들고자 하는 지역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그간 경관 관련 제도가 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소극적 규제였다면, 이제는 '이렇게 하면 지원한다'는 적극적 유도 정책으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이라는 대담한 건축물 유치로 몰락하던 조선소 도시를 문화관광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경관 조성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한국형 경관 모델,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그렇다면 산토리니, 전주 한옥마을, 빌바오와 같은 성공 사례를 한국 각 지역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제3차 계획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첫째, 지역 고유 자원의 발굴과 재해석이다. 산토리니가 화산섬이라는 자연환경과 그리스 전통 건축을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재해석했듯이, 전주가 한옥이라는 역사적 자산을 도심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듯이, 각 지역은 자신만의 고유한 자연·역사·문화 자원을 찾아내야 한다.

어촌 마을이라면 해양 경관과 어촌 생활문화를, 산간 지역이라면 산림 자원과 전통 산촌 건축을, 역사 도시라면 문화재와 역사적 가로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다. 도시·지역 디자인 혁신사업은 바로 이러한 지역별 특색을 발굴하고 이를 일관된 경관으로 구현하는 데 집중 지원한다.

둘째, 주민 참여와 공감대 형성이다. 전주 한옥마을 주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한옥을 지킨 것은 그들이 한옥의 가치를 믿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 주민들이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것도 그것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세계적 명소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역 주민과의 충분한 소통을 통해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특히 가이드라인 준수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개보수 비용 지원, 세제 혜택 등 실질적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셋째, 과감한 상징성 창출이다.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처럼, 때로는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급 건축물이나 공공시설이 경관 전체를 바꾸는 촉매가 될 수 있다. 중점경관진흥구역 제도는 이러한 대담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규제 특례와 예산 지원을 제공한다.

쇠퇴한 산업도시나 원도심의 경우, 혁신적인 문화시설이나 공공건축물을 중심으로 주변 경관을 재생할 수 있다. 폐산업시설을 문화공간으로 전환하거나, 역사적 건축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는 등의 방법이 가능하다.

넷째, 장기적이고 일관된 지원이다. 산토리니의 독특한 건축양식도, 전주 한옥마을의 보존도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빌바오의 도시 변화도 구겐하임 이후 20년 이상의 지속적인 투자와 노력의 결과다.

정부는 선정된 지역에 대해 5년 이상 장기적으로 지원하며,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실제로 경관으로 구현될 때까지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컨설팅을 제공한다. 또한 성공 사례를 발굴하여 다른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간다.

다섯째, 경관과 지역경제의 연결이다. 세 도시의 공통점은 경관이 관광 및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산토리니는 연 340만 명의 관광객을, 전주 한옥마을은 수백만 명의 방문객을, 빌바오는 문화관광도시로의 완전한 전환을 이뤄냈다.

정부는 경관 조성과 함께 관광 인프라, 지역 특산품 개발, 문화 콘텐츠 개발 등을 연계 지원함으로써 경관이 실제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도록 한다. 경관 산업 생태계 구축 목표는 바로 이를 위한 것이다.

"역사와 미래를 담은" 건축경관의 의미

제3차 경관정책기본계획안의 비전과 목표. 국토교통부 제공

제3차 계획의 비전 "역사와 미래를 담은 국토·도시·건축 경관"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산토리니는 그리스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고, 전주는 조선시대 한옥을 21세기 도시문화와 결합시켰다. 빌바오는 산업도시의 역사 위에 미래지향적 현대건축을 세웠다.

이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존중하되, 그것을 박제화하지 않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미래 가치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규제보다는 비전과 지원이 핵심 동력이었다.

국토부가 제시한 세 가지 목표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품격 있는 국토 경관 형성 △미래 도시건축 경관자산 창조 △민관 협력 산업 생태계 구축. 특히 '창조'와 '생태계 구축'이라는 표현은 경관을 만들어내고 키워내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담고 있다.

경관 산업 생태계, 새로운 기회의 장

서울시의 강남대로 경관개선사업. 서울시 제공

이번 계획의 또 다른 주목점은 경관을 하나의 산업 영역으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그간 경관 정책이 공공 영역에 국한됐다면, 이제는 민간 전문가와 기업이 참여하는 생태계를 조성한다.

산토리니의 경관은 관광산업을 낳았고, 전주 한옥마을은 숙박·음식·문화 등 다양한 비즈니스를 창출했다. 빌바오의 구겐하임은 도시 전체의 경제 구조를 바꿔놓았다. 경관이 단순한 미적 가치를 넘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자산임을 증명한 사례들이다.

국토부는 조경, 건축, 도시계획 등 관련 분야가 경관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이것이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이 되도록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공공 발주 중심이던 조경 산업에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온다.

성공의 조건: 지역 정체성과 주민 참여

전주 한옥마을 전경. 전라북도 제공

물론 과제도 있다. 산토리니와 전주 한옥마을의 성공 이면에는 지역 주민의 자발적 참여와 오랜 시간의 축적이 있었다. 전주 주민들이 감수한 불편, 산토리니 주민들이 지킨 가이드라인처럼, 지역 공동체의 의지가 없다면 어떤 지원도 성공하기 어렵다.

조경 및 환경 전문가들은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위에서 일방적으로 강요되면 또 다른 규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각 지역의 고유한 자연환경과 역사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가이드라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빌바오의 경우도 구겐하임 하나만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다. 이후 20년 이상 도시 전체의 공공공간 개선, 강변 재생, 문화 프로그램 개발 등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한 번의 사업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일관된 비전과 실행이 필요하다.

한국형 경관 성공 모델을 향하여

국가해양생태공원으로 지정된 충남 가로림만의 상징적인 섬 웅도. 충청남도 제공

장우철 건축정책관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그리스 산토리니 섬, 전주 한옥마을과 같은 국내외 성공사례가 지속적으로 창출될 수 있는 제도적, 문화적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제3차 계획(안)은 12월 29일부터 2주간 관계기관 의견조회를 거쳐,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통해 최종 확정된다. 이후 5년간 이 계획이 어떻게 실행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 곳곳에 새로운 산토리니, 새로운 전주 한옥마을, 새로운 빌바오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어촌 마을의 독특한 해양 경관, 산간 지역의 전통 산촌 풍경, 역사 도시의 문화유산, 쇠퇴한 산업도시의 재생. 각 지역이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아 미래를 향한 경관을 만들어갈 때, 그리고 정부가 규제가 아닌 지원으로 함께할 때, 한국형 경관 성공 모델이 현실이 될 것이다.

경관이 규제의 대상에서 지원의 대상으로, 관리의 영역에서 창조의 영역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전환점. 한국의 경관 정책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 첫발을 내딛었다.